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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_시

2. 고려사람

(2023년 11월 2일)


2. 고려사람


저 철길 위에 빛나는 별빛을
달리는 기차는 사랑했나 보다
호박꽃 핀 밤을 지나
푸른 바다를 건너간다
우즈베키스탄으로, 카자흐스탄으로, 다시 연해주로
우리는 노예였으므로 어머니,
저녁 밥상에 옹기종기 모였다가는
어두운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차가운 별빛의 사랑을 꿈꾸었습니다
노래와, 우리가 두고 온 땅의 작은 씨앗만을 품고 우리는
우리의 눈물로 푸른 바다를 출렁이게 했습니다
당신이 주신 부러진 칼은
이미 정든 땅에 묻어버리고 잊은 지 오랩니다
시베리아의 바람은 검은 눈동자를 얼리고
기차는 쉬지 않고, 우리의 고통은
불모의 땅만큼 넓고 황폐해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짐승의 삶 속에서 죽어가며 벌린
당신의 입속에
노래와, 다시 저 들판을 출렁일 볍씨를 심었지요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 사랑 앞에서는
국가도, 국민도, 민족도, 몰아치는 매서운 추위도, 레닌도, 스탈린도, 트로츠키도, 그저
지나가는 비 - 같았습니다.
다시 우리의 유랑도 끝이 없습니다
우쑤리 강으로, 블라디보스트크로,
저 별빛은 여기를, 달리는 기차를
미친 사랑으로 이끕니다
이것이 사랑이라면
이것을 사랑으로 알고

* 함성호, [키르티무카]에서 (85~87)
- 문학과지성 시인선 383, 2011. 2.28)



:
이 시집, 참 어렵고 어렵고 되게 어렵다.
다만, 저 낱말들이 던져주는 먼 곳의 느낌이 좋다.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연해주'...
살아 생전 한 번이나 가볼 수 있을지도 모를 그런...

비록 시인은 격렬히 거부하는
'연금 생활자'라도 되겠답시고 하루하루
출퇴근하는 삶을 살아가지만

눈은, 꿈은
'저 철길 위에 빛나는 별빛을'을 바라보며,
나도, '사랑'하니까.


"이것이 '사랑에 빠지는 것'의 진정한 의미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위험을 무릅쓰는 것, 이 숙명적인 만남으로 인해 일상의 좌표가 변경되리라는 점을 알면서도, 오히려 바론 그런 이유에서 만남을 갈구하는 것. 그 밖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
* 호르바트의 <사랑의 급진성>에서 (18)

( 170403 들풀처럼 )


늦은 퇴근길
밤풍경이 깊어갈수록

먼 곳이
그리워진다

( 231102 들풀처럼 )


#오늘의_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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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티무카"란?

더 이상 없앨 것이 없다고, 나는 나에게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 그게 이름이든 부처든 모든 것을 거부하겠다고. 그렇게 키르티무카는 스스로 하나의 원이 되고, 먹는 자이자 먹히는 자가 되었다. 세계 속에 기거하는 하나의 존재이던 그가 스스로 하나의 세계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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