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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_시

어느 저녁

(2026년 4월 16일)


어느 저녁


끓어오르며 소용들이치던 것들을
찬물에 헹구어 채반 위에 얹어놓고 나니
마음도 국수 타래처럼 찬찬히 자리를 틀고 앉았습니다
애호박을 싸박싸박 채 썰어 밀어놓는 동안
마음 한쪽이 그렇게 소리를 내며
잘려나가는 듯한 초저녁
묵은 김치를 더 잘게 썰어 얹어 한그릇의
국수를 비우는 동안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녁산은 위로 짙은 쪽빛의 시간이
잉크처럼 번져 내려오듯
무어라 이름 지을 수 없는 아릿한 것이
명치끝을 타고 내려오는 게 느껴졌습니다
이승에서 이렇게 애틋함과 슬픔을
한그릇씩 나누어 먹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찔레꽃에게 말하고
한세상 사는 동안
좋은 사람과 함께 호젓한 풍경이 되어
저물 수 있던 날을 고마워하며
찬물에 젓가락을 씻어 물방울을 털어내다가
잠시 뼈와 살 사이가 시큰해졌습니다
일어서기 전에 듣고 싶어하는 말을 끝내 하지 못하고
오늘 처음 붓꽃이 피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말하고
둘아가는 그이의 발소리를 붙잡지도 못하였습니다
밤에도 검은등뻐꾸기는 울고
북두칠성 일곱 별은 그가 가는 길을 따라
몸을 틀며 별자리를 조금씩 옮기고
아까시꽃이 향기의 긴 꼬리를 그으며
별자리 뒤를 따라 올라갔습니다
불빛 하나 고개를 넘어가다 잠깐 눈물처럼
반짝이며 떨어지고 난 뒤 사방은 더 어두워졌고
호랑지빠귀가 한숨을 길게 쉬는 듯한 울음을 내뱉는 걸
숲은 다 듣고도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 도종환, [사월 바다]에서 (14~15)
- 창비시선 403, 2016. 9.21


:
이승에서 이렇게 애틋함과 슬픔을
한그릇씩 나누어 먹을 수 있어 다행인 순간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기에

열 두번째 그날이 와도
망설이고 있었네요.

그 해 봄날,
랑딸과 같은!!! 나이의 아이들,

고작 이 날이 되어서야 돌아보는
무심함에 망설이고 있었네요.

노란 리본을 고쳐 매며
잊지 않겠습니다.

( 260416 들풀처럼 )


#오늘의_시


- 그림 : 신재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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