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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_시

가리비

(2023년 12월 29일)


가리비


오늘은 흐리고 비,
슬픔을 가리기 위해 일기를 쓴다

일기가 숙제였던 시절, 나는 받아쓰기보다 가리는 법을 배웠다
즐거운 일을 지어내 칸을 메우고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웃는 얼굴을 그렸다

가리지 않고 사는 원시부족은
문자가 없고
벌거벗은 몸에 진흙을 발라 그림을 그린다
사냥한 새끼 원숭이를 구워 먹고
그 뼈로 귀를 뚫어
한 날의 감정을 춤으로 내려쓰는 것이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가리지 않고 사는 삶은
얼마나 서정적인가

가정방문 날, 내가 쓴 일기는 거짓말인 게 탄로났지만 그 후로도 나는 칸칸이 없는 이야기를 지어냈다

오늘은 가리고 비,
일기를 쓴다

검사가 아닌 위로의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고 싶은 것이다

* 박은영, [우리의 피는 얇아서]에서 (82~83)​
- 시인의일요일시집 004, 2023. 4. 5



:
주 7일에서 주 5일로,
올해는 그마저도 무너진,

시를 벗삼아 날마다 쓰던
나의 일기,

그만하면 되었다
이제는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가리지 않고 사는 삶, 속으로 ~

2023년 한 해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 231229 들풀처럼 )


#오늘의_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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