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늘의_시

오래된 영화

(2023년 9월 22일)


         오래된 영화


깊이 잠들었다 눈뜬 아침에
내 인생이 오래된 영화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오래된 것은 그저 오래된 것
한옥 마을 앞에서 '얼마든지, 얼마든지'
약속하는 두 사람 같은 것

레트로풍의 활짝
벌어지는 주름치마를 입고

인간의 역사를 다룬 영화를 볼 때

활짝 펼쳐진 입체 그림책같이
올록볼록 솟아나는 사람과 풍경들

이 세상은 알 수 없는 은유로 가득해

어느 날 우리 집 초인종이 울린다면
시킨 적 없는 택배가 우르르 도착한다면

죽은 택배 기사와 언 손을 문지르며
쿠키를 쪼개 나누어 먹는 고요한 시간에 대하여

아코디언 연주자가 처음부터 다시
연주를 반복하는 것

트럼프 카드를 쥔 마술사가
여러 종류의 카드를 펼쳐두는 것

긴 기억의 회랑을 건너
문지방을 밟고 나의 방을 바라보면

녹색 담요를 두른 작은 개와
어둠에 휩싸인 책들

문지방을 밟고 반대편을 바라보면
할머니가 된 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

무엇을 먹고 무슨 꿈을 꾸는지
어떤 일과로 하루가
굴러가는지

그 방에는 아직 녹색 담요가 남아 있는지

작은 개가 내 손을 건드릴 때
내인생이 오래된 레코드처럼
튀었다 흐르기 시작해

활짝 벌어진 주름치마는
무언가 말하려 살짝 벌어진 입술같이

* 주민현,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에서
- 창비시선 490, 2023. 7.14



:
어둠에 휩싸인 책들
을 털어 내는 작업을

주말마다, 몇 주 째
이어가고 있다

오래된 동네에서
오래된 영화를 보며

오래, 더 오래
함께, 살아가기 위하여

( 230922 들풀처럼 )


#오늘의_시

 

'오늘의_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때  (0) 2023.09.26
흔들흔들  (2) 2023.09.25
꽃무릇  (0) 2023.09.21
그리움을 사수하다  (0) 2023.09.20
잊어버리고  (0) 2023.09.19